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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가 된 레전드들 - ⑤] 그라운드를 겨누다, 스나이퍼 장성호

Overtake! 2025. 5. 29. 15:49

"스나이퍼" 장성호

KBS N SPORTS 해설위원

생년월일 1977년 10월 18일
학력 충암초등학교
충암중학교
충암고등학교
호남대학교
프로입단 1996년 2차 1라운드 (전체 6번,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6 ~ 2000)
기아 타이거즈 (2001 ~ 2010)
한화 이글스 (2010 ~ 2012)
롯데 자이언츠 (2013 ~ 2014)
KT 위즈 (2015)
통산기록 타율 .296 / 출루율 .394 / 장타율 .451 / OPS .845
안타 2,100개 / 홈런 221개 / 도루 99개
한국시리즈 우승 2회 (1997, 2009)
수상 기록 출루율 1위 (2000)
타격 1위, 출루율 1위 (2002)
주요 기록 역대 2번째 2,100안타 (2015)
국가 대표 올림픽 : 2000(동)
아시안 게임 : 2002(금), 2006(동)
아시아 선수권 대회 : 2003(동), 2007(은)

 

아마추어 시절: 현실판 "정대만" 야구가 하고 싶어요.

김성근 감독이 야인(野人)이던 시절, 전국을 떠돌며 인스트럭터로 활동하던 중 고양시 원당 농협대 야구장에서 한 중학교 3학년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은 나무 배트를 들고 98m의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대형 홈런을 날렸다. 당시 아마추어 야구도 나무 배트를 사용하던 시절이었기에 이 장면은 더욱 인상 깊었다. 김 감독은 그 자리에서 말했다. "넌 야구로 성공할 수 있다." 그 소년의 이름은 장성호였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장성호는 자연스럽게 야구 명문 충암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사춘기의 거센 바람 앞에 흔들렸다. 고교 1~2학년 시절, 그는 야구보다는 오토바이에 더 빠져 있었고, 사실상 팀을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말처럼 그는 결국 야구로 돌아올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야구가 다시 하고 싶어진 그는 3학년 때 팀에 복귀했고, 돌아오자마자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에이스 박명환과 함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이끌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2년의 방황을 딛고 단 1년도 되지 않는 복귀 기간 동안 보여준 장성호의 잠재력에 반한 팀이 있었다. '왕조'라 불리며 프로야구를 지배하고 있던 해태 타이거즈였다. 해태는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장성호를 2라운드 1번 (전체 6순위)로 지명했고 계약금 1억원을 안기며 파격적인 대우로 그를 영입했다.

해태-기아 타이거즈 시절: 붉은 심장의 스나이퍼 (1996-2010)

시즌 타율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1998 .312 15 49 5 .381 .462 .843 135.4 3.81
1999 .342 24 62 5 .420 .561 .981 156.2 5.68
2000 .324 14 48 6 .436 .489 .925 157.6 5.81
2002 .343 19 95 7 .445 .522 .967 171.4 5.93
2003 .315 21 105 13 .417 .417 .949 162.3 6.31
2006 .306 13 79 6 .413 .456 .869 162.9 6.26

 

1996년, 광주 진흥고 운동장. 처음으로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은 장성호가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쨍그랑, 쨍그랑—타석에서 날린 타구들이 연이어 창문을 깨뜨리며 박혔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김응용 감독은 단번에 그에게서 남다른 타격 재능을 느꼈고, "한번 제대로 키워봐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데뷔 시즌, 그는 71경기에 출전해 타율 0.206, 홈런 2개, 타점 11개로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습과 경기에서 드러난 잠재력 덕분에 꾸준히 기회를 부여받았다.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한 장성호

 

1997년,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을 소화한 장성호는 본격적으로 주전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타격코치 김성한과 함께 외다리 타법을 집중적으로 연습하며 매일같이 땀을 흘렸고, 점차 자신만의 타격 스타일을 완성해나갔다. 훗날 KBO 타격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외다리 타법'은 이 시기부터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외다리 타법'에 완전히 적응한 장성호의 방망이는 본격적으로 불을 뿜기 시작했다.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타율 3할을 돌파했고, 홈런 15개를 기록하며 거포로서의 가능성도 증명해냈다. 상대 투수들 사이에서 경계 대상 1순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장성호 특유의 외다리 타법

 

1999년은 장성호라는 이름 석자를 KBO와 대한민국에 알린 한 해였다. .342의 고타율과 함께 24개의 아치를 그리며 리그 최정상금 타자로 우뚝 섰다. 그의 매서운 방망이는 팀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시즌 해태 타이거즈는 임창용을 삼성에 넘기는 대가로 양준혁을 데려왔고 장성호, 홍현우, 트레이시 샌더스로 대표되는 막강한 핵타선을 구축했지만 핵심투수였던 이대진, 이강철, 김상진, 임창용이 각각 트레이드와 부상으로 7위를 기록했다. 역시 야구는 투수놀음...

 

2000년 해태 타이거즈는 암울했다. 투수력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고 그나마 역할을 해주던 타격이 전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덕분에 하위권을 해맸다. 팀의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자존심을 지켜준 선수가 장성호였다. .324의 고타율을 유지했고 14의 홈런을 기록했고 무엇보다 .436로 리그 출루율 왕을 차지하며 팀의 꼴찌추락을 막아냈다.

 

2001년 8월 1일, IMF의 여파로 흔들거리던 모기업 해태제과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기아자동차에 팀을 매각하면서 기아 타이거즈가 출범하게 된다. 팀의 변화에도 장성호는 흔들리지 않았고 3할이 넘는 타율과 2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97타점을 올렸고 꾸준함을 증명했다.

 

2002년부터는 일본에서 활약하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돌아왔고, 김종국이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기아 타이거즈의 테이블 세터는 활기를 되찾았다. 이에 따라 장성호는 테이블세터에서 중심타선으로 이동해 3번타자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중심 타선으로 자리를 옮긴 장성호의 타격재능은 폭발적이었다. 그는 타율 .343을 기록했고 19개의 홈런 95타점을 기록해내며 '국민타자' 이승엽을 제치고 타격왕, 출루율 왕에 올랐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기아 타이거즈도 암흑기를 끝내고 정규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복귀했다. 

 

2003년에도 그의 꾸준한 활약은 계속되었다. 타격왕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장성호는 타율 .315 홈런 21개 105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기여했고 리그 최고의 공격형 1루수로서 그의 입지를 다졌다.

 

2004-5년에도 3할의 타율을 기록했고 각각 19개 16개의 아치를 그려내며 팀의 중심 타선을 꾸준히 지켰다. 2005 시즌이 종료된 후 장성호는 FA자격을 얻어 당해 최대어로 떠오르며 시장에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장성호는 4년간 최대 42억에 계약을 마무리지으며 고향팀 타이거즈에 충성심을 보여줬다. 

 

2006시즌 서정환 감독이 홈런이 많이 나오는 홈구장의 특성을 조정하기 위해 기존 97-113-97미터를 97-119-97로 늘리고 가운데 담장에 그린 몬스터를 설치하면서 무등구장은 투수 친화구장으로 바뀌게 되었다.하지만 장성호는 3할의 타율과 함께 13개의 홈런 79개의 타점을 기록하면서 꾸준한 모습을 이어갔다.

 

2007시즌을 앞두고는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구단 선수들의 투표에 의해 장성호는 주장으로 선출되었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형저메' 최희섭이 기아 타이거즈로 복귀했다. 그의 주포지션이 1루수였기 때문에 장성호는 1루 자리를 내주고 본격적으로 좌익수로 출전하게되었다.

 

또 이 해는 장성호 개인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바로 '좋은 타자의 기준'이라고 평가받는 3할타율의 10년 연속 도전하는 중요한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 도중 신경현과 홈 충돌로 인해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그의 도전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시그니처였던 외다리 타법에 무릎부상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부상의 여파로 타율 .281에 머물게 되면서 10년 연속 3할타율을 향한 도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2008-2009년에는 장성호에겐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당시 감독이던 조범현 감독과 플래툰 기용과 소통 오류의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크게 갈등을 빚어 앙금이 생겼다. 이 사건은 후술할 트레이드 파동의 원인이되었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도 장성호는 2008-09시즌을 치뤘고 감독과의 갈등으로 인해 경기에 출장한 횟수는 줄었지만 타율 .304, .284를 기록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해냈다.

 

2023년 장성호가 WBC 전력강화위원이 되면서 조범현 감독과 같이 삿포로에 일본팀 전력탐색을 가게되었고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화해했다고..

 

2009시즌이 끝난 뒤, 장성호는 두번째 FA를 선언했다. 그런데 이 선언이후 여론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번째 FA 계약 당시, 장성호가 "두번째 FA는 신청하지 않고 타이거즈에 남도록 하겠다." 라고 팬들과의 약속했기 때문이다. 결국 두번째 FA선언은 그 약속을 어긴 셈이 되었고, 팬들의 실망감과 비판 여론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장성호가 시장에 나왔지만 그를 영입하려는 구단은 없었다. 첫 번째 FA로 인해 연봉이 너무 높았고, 그를 영입할 경우 발생하는 막대한 보상금이 큰 부담이 되었다. 여기에 2008년 부상의 여파로 인한 수술 경력 그리고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 또한 걸림돌이었다. 그리고 한국 야구의 1루수는 전통적으로 장타력을 갖춘 거포가 선호되는 포지션인데, 컨택 위주의 타자인 장성호는 전통적인 1루수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그를 원하는 구단은 드물었다.

 

게다가, 장성호가 구단과 심각한 갈등 끝에 시장에 나왔다는 사실도 구단들 사이에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따라서 다른 팀들은  그가 FA미아가 되어 기아 타이거즈와 어쩔 수 없이 재계약하게 된다면 트레이드 매물이 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된다면 FA 보상금 없이 더 적은 출혈로 장성호를 영입할 수 있었기에, 나머지 구단들은 장성호와의 FA계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장성호를 FA로 원하는 팀은 단 한 곳도 없었고, 그는 원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와 재협상에 들어갔다. 최종 협상에서 '조건에 맞는 팀이 나타날경우 트레이드를 추진한다.'라는 단서를 붙여 연봉 2억 5천만원으로 재계약했다. 장성호가 재계약하자, 야구 커뮤니티에는 한화 또는 두산으로의 트레이드설이 돌았다. 두산의 김태영(개명전. 김상현)과 트레이드가 되었다는 설이 있었으나, 한 기자가 아직 성사되지 않은 계약을 성사된 것처럼 언론에 보도하여 파토가 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2010년 6월 8일, 장성호는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를 통해 장성호, 이동현, 김경언이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고, 안영명, 김다원, 박성호가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이로써 1996년 데뷔 15시즌을 몸담았던 장성호와 타이거즈는 작별했고, 그의 찬란했던 타이거즈 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한화 이글스 시절: 기록만 남긴 유니폼 (2010-2012)

시즌 타율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2012 .263 9 52 2 .364 .392 .756 128.5 2.70

 

한화 이글스 시절 장성호

 

2010시즌 도중 트레이드된 이후, 장성호는 그답지 않은 부진한 활약을 펼쳤다. 부진의 원인으로는 트레이드 과정에서의 혼란과 훈련부족이 지적됐다. 실제로 당시 한화 이글스의 한대화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훈련이 부족해서 하체가 부실해진 상태가. 올시즌이 끝나면 하체 강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시킬 계획"이라고 밝히며 장성호의 훈련량 부족이 부진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2010시즌을 마치고 장성호는 오른쪽 어깨 연골 봉합 수술을 받았다. 시즌 내내 통증을 참고 진통제에 의존해 경기를 치렀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트레이드 당시 구단이 잔부상 수준이라고 발표했지만 시즌이 끝나고 수술을 받자 한화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일부 팬들은 장성호가 말년에 돈을 벌기 위해 이적한 뒤 몸상태를 숨겼다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2011시즌이 시작되고 장성호의 대체자들이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팬들의 시선은 빠르게 변했고 장성호가 언제 복귀하는지 그리워하는 팬들도 있었다. 4월 말 이대수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장성호가 1군으로 콜업되었고 복귀 첫날 두산 베어스전에서 대타로 출전해 1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통산 1800안타를 달성하며 부활을 예고했다. 6월에 있었던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는 통산 4번째 1000사사구 기록을 달성했고 그 기록은 카림 가르시아의 만루홈런으로 이어지며 짜릿한 팀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기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장성호 타격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출루조차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2010년에는 트레이드 파동으로 2011년에는 어깨 봉합 수술로 2년 연속 스프링 캠프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체력 저하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2012시즌에는 130경기에 출장해 타율 .263 홈런 9개 52타점 OPS.756을 기록하며 나름 준수한 활약을 했다. 그리고 11월 27일 한화 이글스가 롯데 자이언츠와 "송창현 ↔️ 장성호" 맞트레이드에 합의하면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되었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논란의 행정, 그 희생양 (2013-2014)

2013시즌이 시작되고 장성호가 개막전에서 보여준 결정적인 동점 적시타는 팬들에게 희망을 줬다. 여전히 클러치 능력은 살아 있었고, 경험 많은 베테랑으로서 팀의 중심을 잡아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후 박종윤과 1루수에 번갈아 투입되었고 점점 하락하고 있던 수비력에서 문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그의 입지는 점차 좀아졌고 결국 2군으로 강등되고 만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장성호

 

이후 7월에 다시 1군에 합류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시즌이 끝나고 2차 드래프트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장성호의 이름값 답지 않은 말년을 보냈다.

 

2014시즌 전 장성호는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고 싶다."며 은퇴의사를 내비쳤다.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뒤, 기아 타이거즈에서 은퇴식을 희망하며 자신이 가장 빛났던 타이거즈로의 향수를 드러냈다. 

 

2014년, 은퇴 의사를 내비친 후 장성호는 시즌 구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고작 5경기에 대타로 출전하는 데 그쳤고, 이후 1군 경기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해 롯데 자이언츠는 ‘CCTV 사찰 사건’으로 내외부의 큰 충격을 받았다. 시즌 시작 전부터 구단 사장의 주도 아래 선수들이 원정 숙소에서 CCTV로 사찰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단 분위기는 극도로 경직됐다. 특히 장성호가 이 사찰에 대해 항명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이는 그가 1군에서 배제된 비공식적인 이유로 거론되기도 했다.

 

롯데 자이언츠에서 장성호는 행정논란과 권력 싸움 속에서 결국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 점차 밀려나는 상황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구단의 복잡한 내부 사정과 갈등이 그의 마지막 불꽃을 피울 수 있는 기회마저 꺼트렸다. 그의 롯데 시절은 씁쓸했다.

 

KT 위즈 시절:  스나이퍼의 마지막 불꽃 (2015)

시즌 타율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OPS wRC+ WAR
2015 .309 1 16 1 .421 .383 .804 113.5 0.25

 

2014시즌이 끝난 뒤, 장성호는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며 방출당했다. 은퇴를 결심했던 장성호는 신생팀 KT 위즈로 합류한다. KT 위즈의 초대 감독은 조범현으로 장성호와는 악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성환의 중재로 장성호가 먼저 조범현과 화해무드를 만들어냈고 조범현 감독이 먼저 장성호에게 KT로 합류할 것을 권유하며 자연스럽게 이적하게 되었다.

 

KT 위즈 시절 장성호

 

신생팀으로 이적한 장성호는 주로 대타위주로 경기에 출전했는데 49경기에 나서 타율 .309, 출루율 .421, OPS .804 를 기록하면서 옛스승 밑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시즌을 마친 뒤, FA 자격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2100안타를 채웠고 본인이 좀 더 나은 성적을 기록할 수 없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했다.

 

장성호의 은퇴식은 KT의 배려로 치뤄질 수 있었다. 본인이 소원하던 기아 소속으로의 은퇴식은 아니었지만 선수생활을 시작한 타이거즈와 마지막 소속팀 KT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본인이 생각한 대로 다 이뤄진 완벽한 은퇴식이라고 밝혔다.

 

기아 타이거즈 - KT 위즈 경기에서 펼쳐진 장성호의 은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