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 이상훈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
생년월일 | 1970년 3월 11일 |
학력 | 서울신길초등학교 강남중학교 서울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
프로입단 | 1993년 LG 트윈스 1차 지명 |
소속팀 | LG 트윈스 (1993 ~ 1997) [47번] 주니치 드래곤즈 (1998 ~ 1999) [17번 - SAMSON LEE] 보스턴 레드삭스 (2000) [40번] LG 트윈스 (2002 ~ 2003) [47번] SK 와이번스 (2004) [47번] |
통산기록 | KBO : 308경기 / 909.2이닝 / ERA 2.56 / 71승 / 40패 / 98세이브 NPB : 47경기 / 128이닝 / ERA 3.30 / 7승 / 5패 / 3세이브 MLB : 9경기 / 11.2이닝 / ERA 3.09 / 0승 / 0패 / 0세이브 MiLB : 88경기 / 124이닝 / ERA 3.48 / 8승 / 7패 / 6세이브 |
한국시리즈 우승 | 1회 (1994) |
수상 기록 | 다승왕 [1] (1994) 다승왕 [2], 승률왕, 골든글러브 [1] (1995) 세이브왕 [1] (1997) |
주요 기록 | 통산 27완투 / 8완봉 |
국가 대표 | 아시안게임 : 2002(금) |
아마추어 - "지옥에서 데려온 좌완 파이어볼러"
이상훈은 서울고등학교 시절 좋은 폼을 가진 130Km/h 후반대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좌완 투수로 이름이 나있었지만, 큰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하지만 그의 좋은 폼을 눈여겨본 고려대의 스카우터가 그를 스카우트했고 고려대에 진학하게 된다.
고려대에 진학한 그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돈을 벌기위해 여러 차례 학교를 이탈했다. 학교 선배이자 절친한 동료였던 임수혁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은사였던 최남수 감독이 그를 붙잡아 학교로 돌려놓았고 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왔다. 이상훈 또한 이때부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운동에 매진하며 대학 리그를 대표하는 좌완투수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이상훈은 웨이트 트레이닝에 매진했고 130Km/h 후반이던 구속을 145Km/h로 끌어올려 파이어 볼러로 성장했다. 그 결과 1992년 춘계리그에서 성균관대와의 경기에서 4회 초 조성민을 구원등판했고 9회 초까지 무려 14 타자 연속 탈삼진이란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 [** 종전 기록 : 1975년 철도고 이진우의 10 타자 연속 탈삼진 - 출처: 중앙일보 **] 서울 연고 프로팀의 영입 0순위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지옥에서 데려온 좌완 파이어볼러였다.
서울 연고 프로팀은 LG 트윈스와 OB 베어스였고 이 당시에는 주사위 던지기로 연고지 우선 지명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주사위로 인해 양 팀의 명암이 엇갈렸다. 양 측 모두 대졸 좌완투수 이상훈 영입을 추진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사위 던지기에서 승리해야 했다. 두 개의 주사위를 세 번 던져 많은 숫자가 나오는 팀이 우선권을 가지는 방식이었다.
1993년 이상훈을 영입하기 위해 두팀은 치열한 주사위 승부를 벌였고, LG의 유지홍이 주사위를 잘 굴려 21:16으로 승리했다. LG 트윈스는 이변 없이 이상훈을 지명했고, OB 베어스는 추성건을 지명했다. 그렇게 이상훈은 LG맨이 되었다.
LG 트윈스 - "에이스에서 마무리까지"
시즌 | 출장경기 | 소화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1993 | 28 | 150.2 | 3.76 | 9 | 9 | 75 | 131 | 1.35 | 1.30 |
1994 | 27 | 189.2 | 2.47 | 18 | 8 | 57 | 148 | 1.04 | 5.93 |
1995 | 30 | 228.1 | 2.01 | 20 | 5 | 48 | 142 | 0.87 | 7.79 |
1993년, 이상훈은 프로 무대에 첫 발을 내디뎠다. 데뷔 첫 해 기록은 9승 9패. 언뜻 보면 준수한 성적처럼 보였지만, 시즌 전체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1993년은 KBO 역사상 손에 꼽힐 정도의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리그 전체가 투수 친화적인 환경 속에 놓였고, 때문에 3점대 평균자책점은 더 이상 '잘 던진 투수'의 상징이 아니었다. 이상훈이 기록한 3.76의 평균자책점은 규정이닝 투수들 중 하위권, 정확히 말하면 뒤에서 세 번째였다. 기록만 놓고 보면 아쉬움을 지우기 어려웠다.
신인왕 경쟁도 녹록지 않았다. 1993년은 양준혁, 이종범, 구대성, 마해영, 최태원 등 대어급 신인들이 대거 등장해 리그를 뒤흔든 해였다. 그들의 엄청난 활약으로 9승을 거두는 데 그친 이상훈은 신인왕 후보 5명 안에도 들지 못했다. 그해의 신인왕은 양준혁이 차지했는데 무려 타율 .341 / 홈런 23개 / 타점 90개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훈은 팀에 꼭 필요한 존재였다. 정규 시즌에서 두자리수 승수에는 실패했지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힘을 보탰고, 특히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탈락 위기의 팀을 구하는 투구로 팬들의 뇌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결과적으로, 이상훈의 데뷔 시즌은 화려한 수상 이력 대신 한 걸음 한 걸음 프로 무대에 자신의 존재를 새기는 과정이었다.
1994년, 이상훈은 진화했다. 더 이상 가능성의 투수가 아니고 명백히 팀의 에이스였다. 김태원, 정삼흠과 함께 선발진의 삼두마차를 이루며 맹활약했고, 정규 시즌 18승을 따내며 조계현과 함께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팀 역시 그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정규 시즌을 넘어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했다. 그해 LG 트윈스가 거머쥔 우승 트로피에는 이상훈의 이름이 가장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골든글러브 수상도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또 다른 대기록이 있었다. 같은 해, 태평양 돌핀스의 마무리 투수 정명원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단일 시즌 40세이브를 돌파한 것이다. 전례 없는 기록이 주는 상징성에 밀려, 이상훈은 아쉽게 수상의 기회를 내주어야 했다.
수상의 아쉬움은 남았지만, 1994년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상훈이 프로야구 무대의 중심에 선 해였다. 다승왕을 차지하며 팀의 '1 선발' 역할을 해냈고, 팀과 함께 정상에 섰다. 화려한 수상 기록이 없더라도, 그가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은 한 해였다.
1995년, 이상훈은 더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20승을 쌓으며 2년 연속 다승왕을 차지했다. 좌완 선발로 단일 시즌 20승을 기록한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고, 무려 22년이 지난 2017년, 양현종이 KIA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20승 5패를 기록하면서야 비로소 같은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고의 좌완이라 평가받는 류현진, 김광현조차 이루지 못한 기록이었다.
그럼에도 시즌 MVP는 OB 베어스의 외야수 김상호에게 돌아갔다. 이상훈은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부진하며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 LG 트윈스 역사상 드문 MVP 수상자 배출 기회를 놓쳤다. 비록 이번에도 손에 쥔 트로피는 없었지만, 1995년의 이상훈은 1998년 김용수, 2001년 신윤호와 함께 LG 유니폼을 입고 MVP 문턱까지 가장 근접했던 인물로 남았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아쉬웠지만, 휴식을 충분히 취한 이상훈은 '2회 한일 슈퍼게임'에서 다시 진가를 드러냈다. 한국프로야구 올스타팀은 일본프로야구 올스타를 상대로 2승 2무 2패를 기록했는데, 이상훈은 1차전과 5차전에 선발 등판, 12이닝 동안 단 1 실점만을 허용했다. 특히 일본이 최정예 멤버를 내세운 1차전에서 거의 무결점 피칭을 선보이며 한국 야구가 일본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음을 증명했다.
1차전을 앞두고 일본 기자들이 선동열에게 "1차전 선발은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 선동열은 이렇게 답했다. "올해 대한민국에는 20승 투수가 있다. 그에게 물어보라." 그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이상훈은 7이닝 가까이 일본 타선을 꽁꽁 묶으며, '대한민국 20승 투수'의 실력을 증명했다.
시즌 | 출장경기 | 소화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1996 | 41 | 99.1 | 2.54 | 3 | 3 | 10 | 37 | 95 | 2.58 | 2.58 |
1997 | 57 | 85.1 | 2.11 | 10 | 6 | 37 | 25 | 103 | 3.04 | 3.04 |
1996년, 이상훈은 예상치 못한 벽에 가로막혔다. 시즌 도중 손가락 혈행장애와 척추분리증이 발병하면서 더 이상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동안 팀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그였지만,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팀은 결단을 내렸다. 기존 마무리 투수였던 김용수와 보직을 맞바꾸며 이상훈을 중간계투 및 마무리로 돌렸다.
보직 변경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상훈은 새로운 역할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41경기에 등판해 100이닝에 가까운 이닝을 소화했고, 10세이브를 올리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비록 과거처럼 선발로 마운드를 지배하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팀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신의 몫을 묵묵히 해냈다. 그리고 이상훈은 마무리라는 보직 자체에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훈은 1997년을 선발 복귀의 해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팀 내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선발을 고집한 베테랑 김용수 때문에, 이상훈은 또다시 뒷문을 지켜야 했다. 본격적으로 마무리 투수로서 나서게 된 이상훈은 10승 37세이브를 기록하며 총 47세이브 포인트[** 세이브포인트 = 세이브 + 구원승 **]로 구원왕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는 당시 정명원이 보유하고 있던 KBO 한 시즌 세이브포인트(44)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었고, 이후 진필중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는 신기록으로 남았다. 본격적으로 나선 마무리라는 보직에서 그의 남다른 실력을 또 한 번 증명했다.
1997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이상훈은 상대팀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남겼다. 맞붙은 상대는 당대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해태 타이거즈. 당시 타이거즈 타자들은 이상훈의 남다른 구위를 인정하며 "내가 발라블라요"라며 농담 섞인 승부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공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국 우승은 해태 타이거즈의 몫이었다. 이상훈의 동기이자 해태의 중심타자였던 이종범, 그리고 요절한 투수 김상진의 활약이 승부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KBO 무대에서 선발과 마무리, 양쪽 모두에서 정상을 밟은 선수는 흔치 않다. 이상훈은 그 드문 이름 중 하나였다. '좌완 선발 20승', '구원왕'이라는 서로 다른 무게의 타이틀을 모두 손에 넣으며, 그는 이미 국내 야구계에서 한 시대를 증명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더 멀리 있었다. 더 큰 무대, 더 큰 도전을 꿈꾼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200만 달러(약 28억 원)에 보스턴 레드삭스와 이적이 성사되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MLB 구단들이 보스턴과 단독협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MLB 사무국이 개입해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에게 이상훈을 영입할 균등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에 이상훈은 계획에 없던 전 구단 스카우터가 참여하는 공개 테스트를 진행했고 포스팅 제도를 통해 이적팀을 결정해야했다. 그 결과 최고 응찰액은 60만 달러(약 8억 4천만 원). 기대에는 한참 못 미치는 금액에 LG 트윈스는 이상훈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상훈이 '해외진출을 시켜주지 않으면 은퇴해버릴 것'이라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고 포스팅 실패 이후에도 미국에 체류하며 더 이상 LG 트윈스와의 동행은 어려워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의 실력을 기억하는 일본 구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니치 드래곤즈와 LG 트윈스 간의 임대 협상(임대기간 2년 / 임대료 2억 엔(약 20억 원) / 계약금 5천만 엔 (약 5억 원) / 연봉 8천만 엔 (약 8억 원) / 임대 후 완전 이적 조건)이 타결됐고, 이상훈은 주니치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이상훈이 2년 뒤 다시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이에 따라 주니치와 완전 트레이드가 아닌 2년간 임대계약을 맺었다.
등판에는 그의 별명이 새겨졌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야생마처럼 던졌던 투구폼으로부터 붙은 별명 '삼손'. 이상훈은 그렇게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며 더 큰 무대에서 자신의 이름을 증명할 준비를 마쳤다.
주니치 드래곤즈 - "삼손,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다"
시즌 | 출장경기 | 출장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1998 | 11 | 32.2 | 4.68 | 1 | 0 | 0 | 12 | 33 | 1.35 | 0.0 |
1999 | 36 | 95.1 | 2.83 | 6 | 5 | 3 | 30 | 65 | 1.1 | 1.2 |
첫해는 녹록지 않았다. 꿈꿨던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되었고, 이로 인한 훈련 부족으로 경기 감각마저 예전 같지 않았다. 5월 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도쿄돔 원정 경기에서 8회 불펜으로 등판하며 데뷔전을 치렀지만 경기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요미우리의 모토키 다이스케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제구와 경기 운영 모두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과거부터 안고 있던 허리통증과 혈행 장애까지 재발하면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이상훈은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호시노 센이치 감독으로부터 2군행을 통보받는다.
2군행을 통보하며 구단은 한때 이상훈의 방출을 고려했다. 해태 타이거즈가 투수 임창용의 이적을 제시하자 이상훈을 방출하고 그의 영입을 고려 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어디서든 마찬가지다”라는 선동열의 조언을 들은 그는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2군으로 내려가 재기를 결심했고 일본 무대에서 계속 도전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주니치는 그런 그의 태도를 높게 평가해 잔류를 결정했다.
배수의 진을 치고 재기를 다짐했던 이상훈은 1999년, 본래의 기량을 되찾았다. 시즌 초반에는 선발투수로 나서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안정적인 투구를 이어갔다. 그러나 전년도부터 이어진 혈행 장애의 여파로 시즌 중반 잠시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후 중간계투로 보직을 조정하며 복귀했다. 복귀 후에는 짧은 이닝에서의 강점을 살려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상훈뿐만 아니라 이 시기 주니치에는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바람의 아들' 이종범 그리고 '야생마' 이상훈이 같이 뛰고 있었는데 일본팬들은 이를 대한민국 삼총사라고 불렀다. 대한민국 삼총사의 눈부신 활약이 팀의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기여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다만 1999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이상훈은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제외되었고, 주니치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시리즈를 내주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상훈의 1999년은 성적 외적으로도 복잡했다. 주니치와의 2년 임대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LG 트윈스는 그를 완전 이적으로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상훈은 LG 구단과의 관계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과거 LG에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이광환 감독이 경질되던 시점부터 프런트와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LG에 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에서의 연장을 거부하고,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이 선언은 주니치의 일본시리즈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점에 나왔고, 구단과 팬들에게는 충격에 휩싸였다. 주니치 구단은 그의 잔류를 설득했지만,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달랐다. “삼손, 좋아. 남자는 꿈을 가져야 해.” 감독은 오히려 그의 결정을 존중했고, 이상훈은 이후 이 발언에 대해 “감독님께 정말 미안하고, 감사했다”고 회고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 "꿈의 무대, 짧았던 레드삭스의 계절"
1999년 12월 24일, 밀레니엄을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던 그날, 야구팬들에게 선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이상훈의 에이전트인 IMG코리아는 "이상훈이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했다"고 발표했다. 그 팀은 2년 전부터 그를 눈여겨보던 보스턴 레드삭스였으며, 계약 조건은 2년간 총액 335만 달러(약 48억 원). 이상훈에게는 오랜 꿈이었던 미국 무대 진출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기 직전까지도 주니치 드래곤즈는 이상훈과의 재계약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훈은 "미국 무대에 도전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일본을 떠나, 메이저리그에서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시즌 | 출장경기 | 출장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2000 | 9 | 11.2 | 3.09 | 0 | 0 | 0 | 4 | 6 | 1.29 | -0.1 |
2000년,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한 이상훈은 마이너리그에서 71이닝 동안 5승 2패 2.03의 방어율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좋은 성적을 내자 보스턴은 그를 메이저리그로 콜업했고 비로소 빅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불펜으로 9경기, 11이닝 동안 방어율 3.09. 표면적인 숫자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랐다. 11이닝 동안 피안타 11개, 사사구 6개를 허용하며 안정감을 주지 못했고, 땅볼 유도는 거의 없었다. 공이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해도 깊숙한 외야 플라이가 대부분이었고, 빅리그 타자들과의 힘 싸움에서 밀리는 인상이 짙었다.
결국 2001년 시즌에는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 보스턴에서 방출되었고,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 마이너 계약을 체결하며 마지막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2002년 스프링캠프를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방출되고 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상훈의 메이저리그 도전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다.
LG 트윈스 - "돌아온 야생마, 다시 줄무늬를 입다."
시즌 | 출장경기 | 소화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2002 | 52 | 85.2 | 1.68 | 7 | 2 | 18 | 30 | 92 | 0.97 | 4.05 |
2003 | 53 | 56.2 | 3.34 | 4 | 4 | 30 | 21 | 55 | 1.11 | 1.43 |
2002년, 이상훈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마치고 국내 복귀를 타진했다. 그는 친정팀 LG 트윈스의 어윤태 단장으로 부터 복귀 제안을 받았고, 구기종목 사상 최고 연봉이던 4억 7000만 원에 계약하며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돌아온 야생마에 대한 팬들의 기대도 컸다.
복귀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이상훈의 지병인 혈행장애를 인지하지 못한 채 그를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킬 계획이었다. 이는 당시 팀 사정상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외국인 투수 만자니오와 케펜이 기대 이하였고, 김민기 외에는 마운드를 지탱할 선발 카드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LG 프런트의 만류로 선발 로테이션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훈은 중간계투에서 묵묵히 마운드에 올랐고, 시즌 중반에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85.2이닝을 소화하며 고참 투수로서 팀에 크게 기여했다. 이동현, 장문석 등과 함께 이른바 ‘혹사 3인방’으로 불릴 만큼 헌신적인 투구를 이어갔다. 그 결과 LG 트윈스는 준플레이오프 -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상대는 이마양 트리오라 불렸던 '라이온킹' 이승엽, '마포' 마해영 그리고 '양신' 양준혁이 버티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였다. 삼성의 압도적 우위가 점쳐졌지만 LG가 투혼을 보이며 시리즈가 6차전까지 진행된 현재, 전적은 2승 3패였다. 6차전 9회 말 9:6으로 LG가 앞서고 있는 상황. LG는 시리즈 타이를 만들기 위해 '마무리' 이상훈을 마운드로 불러 올렸고, 그는 팀의 우승을 위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한국시리즈 3 연투를 감행했다.
이상훈은 김재걸에게 2루타를 맞으며 선두타자를 2루에 내보내 위기를 맞게 되지만, 다음 1번 타자 강동우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한숨 돌렸다. 다음 타자는 골든 글러브를 수상한 강타자 브리또 3-2 풀카운트에서 회심의 몸 쪽 직구를 던졌지만 볼 판정을 받으며 끝내 볼넷을 허용하고 만다. 주자 1-2루 상황.
그리고 타석에는 '라이온킹' 이승엽이 등장했다. 초구는 134Km/h의 몸쪽 직구가 들어가며 스트라이크. 0-1 볼카운트에서 두 번째 공은 이승엽의 타이밍을 뺏기 위해 125Km/h의 변화구를 던졌다. '딱' 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구친 공은 대구시민운동장을 가로질렀고 쭉쭉 뻗어가던 공은 담장 너머에 떨어지고 말았다. 삼성의 이승엽은 맹수처럼 포효했고 분위기는 일순간에 삼성 쪽으로 넘어갔다.
이상훈이 이승엽에게 동점을 허용하는 3점 홈런을 맞으며 무너졌고, 동점이 된 9회말 홈런타자 마해영의 한방이면 경기가 끝날 수도 있었다. LG는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이상훈을 내리고 최원호를 마운드에 올린다.
그런데 구원등판한 최원하고 1-1 볼카운트 상황에서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LG는 드라마 같은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날 이후 LG는 긴 어둠의 시대에 들어갔다. 이상훈은 복귀 첫 해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올려놓았지만, 그의 마지막 등판은 결과적으로 팀의 긴 암흑기의 서막을 알리는 장면으로 남고 말았다.
이상훈은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리그 연봉 2위이자 투수 최고 연봉(6억 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시즌을 맞이했다. 이는 그가 2002년 복귀 시즌에서 보여준 헌신과 노련미가 팀 내외에서 충분히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표였다. 그는 단순한 베테랑 투수가 아닌, LG 트윈스의 주장으로 임명되며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투수가 주장직을 맡는 것은 KBO 리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즌 초반, 이상훈은 여전히 건재했다. 노장진, 조웅천과 함께 구원왕 레이스를 펼치며 불펜의 핵심으로 활약했고, 중요한 순간마다 팀을 구해내는 베테랑다운 피칭을 보여주었다. 팀 역시 그의 활약을 중심으로 중위권을 유지하며 4강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을 기점으로 이상 기류가 감지됐다. 이전 시즌부터 이어진 과부하가 원인이었는지, 점차 피안타율이 높아지고 실점이 늘기 시작했다. 특히 직구의 위력이 떨어지고 결정구가 맞아나가는 장면이 늘면서 불안한 투구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마운드에 섰지만, 9월 들어 어깨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조기 마감하게 되었다.
이상훈은 끝내 2003년 9월을 마지막으로 LG의 유니폼을 입은 채 1군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그가 처음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던 날로부터 10년, 일본과 미국을 거쳐 다시 돌아온 그의 LG에서의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SK 와이번스- "줄무늬를 벗지 못한 투수"
시즌 | 출장경기 | 출장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2004 | 18 | 14.0 | 5.14 | 0 | 3 | 3 | 9 | 15 | 1.43 | 0.13 |
2004년 1월 14일, 갑작스럽게 LG 트윈스는 SK와이번스와 "이상훈 ↔️ 오승준·양현석" 을 맞바꾸는 2: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팀 리빌딩과 이순철 신임 감독의 구상 차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기타 스캔들'로 [** 이순철 감독은 코치시절 팀이 연패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라커룸에서 기타를 치는 이상훈을 못마땅해했다. 사령탑에 오른 뒤 이 감독은 이상훈에게 팀 분위기를 흐릴 수 있다는 이유로 캠프 때나 시즌 중엔 라커룸이나 호텔에서 기타를 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이상훈은 '사생활 간섭'이라고 반발했다. **] 불리우는 스프링캠프에서의 문제가 원인이라는 설도 돌았다. 훗날 이상훈과 이순철 감독은 이 시기의 오해를 풀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때의 갈등은 결국 그의 두 번째 LG 생활을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새 팀 SK 와이번스는 그를 구원왕 조웅천과 함께 좌우 더블 스토퍼로 구상했다. 시즌 개막전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정팀 LG 트윈스. 그는 마무리로 나와 세이브를 기록했고, 몇 차례는 LG 타선을 틀어막으며 포효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상훈은 점점 구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시즌 중반 2군행, 그리고 6월 2일, 친정팀 LG를 상대로 더 이상 공을 던질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잔여 연봉 6억 원을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했다.
이상훈은 프런트에게 “더 이상 심적인 부담을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계속 야구를 하는 것은 동료들이나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은퇴를 결심했다.”라고 전했고, SK 구단은 당시 감독이던 조범현 감독부터 단장까지 나서서 만류했지만, 그의 뜻은 완고했고, 끝내 임의탈퇴 공시로 절차가 마무리됐다.
이상훈은 은퇴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하며 SK 팬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SK 시절 마운드에 섰을 때 과연 '내가 올바른 정신을 갖고 공을 던지고 있느냐'를 의심했어요. 단지, '해보자' 했어요. 팬에 대한 기만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공을 던질 수 없었어요. 내가 돈을 받고 공을 던지고 있는데….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죠."
이상훈은 늘 강한 자의식을 가진 선수였다. 마운드 위에서 상대를 압도하던 눈빛, 팬들의 환호에 화답하며 유니폼을 휘날리던 포효, 그리고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자기 판단에 따라 길을 정하던 태도. 그 신념은 때로는 구단과 부딪히고, 때로는 언론과 논쟁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상훈을 이상훈답게 만든 본질이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조차 속일 수 없었던 그 신념은 "갑작스런 은퇴"라는 마지막 판단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훈은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마운드를 밟았고, 그 철학을 버릴 수 없다면, 그가 포기한 3억 5천만원의 연봉보다 그의 신념이 먼저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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