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에이스" 정민철
MBC 스포츠 플러스 해설위원
생년월일 | 1972년 3월 28일 |
학력 | 대전 신흥초등학교 충남중학교 대전고등학교 |
프로입단 | 1992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
영구결번 | 23번 (한화 이글스) |
소속팀 | 빙그레 이글스 (1992 ~ 1993) [55번] 한화 이글스 (1994 ~ 1999) [55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0 ~ 2001) [30번] 한화 이글스 (2002 ~ 2009) [~ 2004: 55번 | 2004~: 23번] |
통산기록 | KBO : 393경기 / 2394.2이닝 / ERA 3.51 / 161승 / 128패 / 10세이브 NPB : 12경기 / 59.1이닝 / ERA 4.7 / 3승 / 2패 / 0세이브 |
한국시리즈 우승 | 1회 (1999) |
수상 기록 | 승률왕 (1993) 방어율왕, 탈삼진왕 (1994) 탈삼진왕 (1997) |
주요 기록 | 역대 9번째 무사사구 노히트노런 (1997) 최소경기 1000탈삼진 (1998) 최연소 100승 [27세 3개월] (1999) 최연소, 최소경기 2000이닝 [34세 2개월] (2006) 최연소 2200이닝 투구 (2007) 역대 4번째 1600탈삼진 (2008) KBO 통산 61완투 / 20완봉 (역대 2위) NPB 통산 2완투 / 1완봉 |
아마추어 - "대전의 아들"
정민철의 아마추어 시절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대 최고의 재능들이 즐비했던 '92학번 황금세대'의 그늘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 '천재 투수' 임선동, '리틀 쿠바' 박재홍, '염슬라' 염종석, 그리고 비운의 천재 故 조성민까지, 쟁쟁한 동기들은 정민철에게는 넘어야 할 거대한 벽과 같았다. 더욱이 아마추어 시절 그의 최고 구속은 138km/h에 머무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기에, 화려한 재능을 뽐내던 동기들에 비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중학교 시절, 정민철은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서 1년 유급을 하게 되었고 동갑내기들 보다 후배가 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는게 싫었던 그는 주저 없이 프로 직행을 택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운 좋게 빙그레 이글스의 입단 제의를 받았고, 3학년 때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아마추어 야구의 명문 고려대학교의 입학 제안까지 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프로에 있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프로 무대에 발을 들였지만, 당시 대졸 신인의 연봉이 계약금 포함 1억원이었던 것에 비해 그의 연봉은 계약금 1400만원에 연봉 1100만원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팀 내에서 그의 기대치가 높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빙그레 이글스 - "언더독의 반란, 에이스의 탄생"
시즌 | 출장경기 | 소화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1992 | 33 | 195.2 | 2.48 | 14 | 4 | 7 | 68 | 145 | 1.07 | 7.14 |
1993 | 18 | 148.1 | 2.24 | 13 | 3 | 1 | 40 | 110 | 1.06 | 4.36 |
1992년 빙그레에서 주목받던 신인은 그가 아닌 대졸 신인이자 국가대표 에이스 지연규였다. 그런데 스프링 캠프에서 변수가 생긴다. 주목받던 신인 지연규가 어깨 부상을 당한 것. 그 때까지도 정민철은 2군에 있었다. 시범경기를 앞둔 빙그레는 시뮬레이션 타격훈련을 위해 '훈련용 투수'가 필요했고 2군에 있던 정민철을 추천받았다. 그렇게 정민철은 "이정훈, 이강돈, 강석천, 이중화.."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과의 1군 훈련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대반전이 일어난다. 김영덕 감독으로부터 "1군에 합류하라"는 통보였다. 그렇게 데뷔와 동시에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민철은 "나는 시작부터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기에 프로에서의 생활 하나하나가 정말 소중했다. 뛰라면 뛰고, 던지라면 던졌다. 그때 훈련 강도가 굉장히 혹독했는데, 어린 내가 묵묵히 소화를 하니 감독님, 코치님들이 좀 기특해 하셨던 것 같다. 누구보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했다. 지금 돌아보면 '비슷한 기량이면 정민철에게 기회를 줘보자'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을까 싶다."며 그 때를 회상했다.
4월 5일 LG와의 개막시리즈, 장정순이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빙그레는 만루의 위기를 맞았다. 투수코치는 정민철을 호출했다. 그 누가 정민철이 개막시리즈에서 데뷔전을 치룰줄 알았을까? 꿈의 그리던 마운드로 향하던 정민철은 다리의 느낌마저 느끼지 못할만큼 긴장했다. 마운드 위에 올라 포수의 미트만 보고 정신없이 투구했다. 초구 슬라이더 볼. 2구 슬라이더를 던진 순간 "딱" 소리와 함께 공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담장을 넘어갔다. LG 김동재가 정민철의 공을 받아쳐 만루 홈런을 만든 것 이었다. 정민철은 정신이 번쩍 났고 2군행을 직감했다.
"너 광주 해태전 2차전 선발이다." 낙담하던 정민철에게 또 한번 반전이 일어났다. 김영덕 감독이 그에게 선발 데뷔를 주문한 것. 이상한 일이었다. 만루 홈런을 맞은 자신이 왜 선발인가 의아했지만 그는 감독의 지시대로 선발 경기를 준비했다. 광주에 내려와 1차전, 해태의 강타선은 막강했다. 선발 에이스 한용덕 7실점이나 내줬고 7:3으로 패했다. 정민철은 "죽었다. 내일이 1군 마지막이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4월 8일 선발 데뷔전이 있는 날이다. 정민철은 포수 김상국 선배의 미트만을 보고 공을 뿌렸다. 그 사이 아웃카운트가 하나씩 쌓여갔다.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해태의 타자들이 하나 하나 덕아웃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6회가 끝났다. 86개의 공을 던졌고 장채근에게 솔로 홈런 하나를 허용하긴 했지만, 이외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1실점으로 호투했다. 타선도 화답했다. 장종훈이 1회 김정수의 공을 받아쳐 결승 3점 홈런을 만들어 냈고 팀은 5: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승리투수는 정민철. 데뷔 첫 승리였고, 믿기 어려운 대반전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정민철은 승승장구했다. 1992년 한 해 동안 무려 33경기에 등판, 1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8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었다. 그중 11번의 완투와 3번의 완봉승은 그의 압도적인 투구 이닝과 빼어난 실력을 여실히 증명하는 기록이었다. 팀 또한 그의 활약에 힘입어 81승 2무 43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패하며 아쉽게 우승 트로피를 놓쳤지만, 1992년은 '황금세대' 동기들에 비해 저평가받던 무명의 신인 정민철이 팀의 핵심 투수로 우뚝 서는, 그야말로 '언더독의 반란'과 같은 드라마틱한 시즌이었다.
1993년 군복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위병이 되어 18경기 출장에 그친다. [** 당시에는 병역법상 방위병은 일과 이후 프로 경기에 출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한 정민철은 더욱 성장한 기량을 선보였다. 18경기에 나서 13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4를 기록했다. 그런데 정민철은 선발 등판한 17경기에서 10번의 완투를 기록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독수리 에이스'로서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혔다.
한화 이글스 - "완벽에 가장 가까웠던 투구"
시즌 | 출장경기 | 소화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1994 | 28 | 218.0 | 2.15 | 14 | 10 | 0 | 56 | 196 | 0.97 | 7.64 |
1996 | 32 | 219.2 | 3.03 | 13 | 12 | 0 | 48 | 203 | 1.01 | 4.92 |
1997 | 31 | 208.2 | 2.46 | 14 | 11 | 0 | 45 | 160 | 1.04 | 6.19 |
1999 | 32 | 201.2 | 3.75 | 18 | 8 | 1 | 57 | 151 | 1.17 | 5.60 |
1994년, 정민철은 KBO 리그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평균자책점 2.15와 탈삼진 196개로 당당히 두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리그 최다인 218이닝을 소화할 만큼 뛰어난 이닝이터의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투구에도 불구하고 팀 타선의 지원 부족으로 10패를 기록, 14승에 그치며 승수 부문에서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1994년은 정민철 개인에게는 아쉬움이 남은 시즌이었다.
1995년, 정민철에게 부상이라는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손가락 부상으로 인해 그는 162이닝 출전에 그쳤고, 평균자책점 3.21, 13승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전 시즌의 압도적인 모습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 해였다.
1996년, 정민철은 3.03의 평균자책점과 13승을 기록하며 꾸준함의 대명사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219.2이닝과 203탈삼진으로 투수로서는 역사적인 '200-200'을 달성했다. 그러나 1996년 KBO 리그의 주인공은 단연 그의 팀 동료, '대성불패' 구대성이었다. 마무리 투수로서 평균자책점, 다승, 구원, 승률까지 모조리 석권하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하며 리그 MVP를 거머쥔 것이다. 특히 그해에는 '슈퍼 루키' 박재홍이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하며 강력한 MVP 경쟁자로 떠올랐으나, 결국 구대성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가려 고배를 마셔야 했을 정도였다.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정민철이었지만, 팀 동료의 역사적인 MVP 수상과 리그 전체의 뜨거운 경쟁 속에 그의 꾸준함은 다소 빛이 바랜 시즌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최다 이닝을 소화하며 팀 마운드를 굳건히 지켰지만, 개인 타이틀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1996년이었다.
1997년, 정민철은 208⅔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2.46, 14승 11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해 팬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순간은 5월 23일 OB 베어스와의 경기였다.
이날 정민철은 1회부터 7회까지, 한화의 에이스 정민철은 OB의 강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시속 147km에 육박하는 그의 날카로운 직구와 현란한 변화구 앞에 OB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물러섰다. 단 하나의 안타도, 단 한 개의 볼넷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인 투구. 8회 1사, 타자는 심정수. 정민철은 1-2 상황에서 포수로부터 바깥쪽 높은 코스로 던지라는 사인을 받았고 곧바로 투구했다. 그가 바깥쪽으로 던진 공은 몸쪽 높은 코스로 말려 들어가고 말았다. 실투였다. 다행히 심정수가 체크스윙하며 헛스윙 삼진을 잡아냈지만 포수 강인권이 그 공을 포구하지 못하며 스트라이크 낫 아웃 1루 출루를 허용했다. 강인권이 공을 놓치지 않았다면, KBO 리그 역사상 첫 퍼펙트 게임의 위업이 달성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스트라이크 낫아웃으로 심정수에게 1루를 내준 것이 옥에 티였지만, 정민철은 흔들리지 않았다. 남은 타자들을 침착하게 돌려세우며 9회 마지막 공격을 맞이했다. 9회 마지막 타자 김민호마저 헛스윙 삼진으로 처리하며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경기 후 "퍼펙트 게임을 놓쳐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강인권 선수의 리드가 좋았기에 노히트 노런을 기록할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답하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안타깝게도 영상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날 정민철이 보여준 압도적인 투구는 KBO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1998년, 정민철에게 시련의 계절이었다. 팔꿈치 부상으로 6월과 7월, 선수 생활 처음으로 장기간 결장하며 로테이션에서 이탈했다. 전반기 단 1승에 그치자 팬들 사이에서는 그의 하락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복귀 후 1피안타 1실점의 호투를 선보이며 건재함을 알렸고, 후반기에만 9승을 추가하며 7년 연속 10승이라는 기록을 간신히 이어갔다.
1999년, 정민철은 3.75의 평균자책점과 18승 8패라는 개인 최고 성적을 거두며 맹활약했다. 이는 그의 프로 통산 유일한 15승 이상 시즌이었다. 타고투저의 시대였음을 감안해도 3점대 후반의 방어율은 이전의 압도적인 모습에 비하면 다소 아쉬웠지만, 201⅔이닝을 소화하는 굳건한 이닝이터의 면모는 여전했다.
하지만 평범한 팬들조차 그의 구속 저하를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구위는 점차 하락세를 보였다. 이는 그간의 누적된 혹사로 인한 구위 감소로 짐작되었으나, 당시에는 혹사 문제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고, 정민철 본인 역시 만 27세의 젊은 나이에 특별한 통증을 느끼지 못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훗날 되돌아보면, 윤석민의 사례와 흡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은 정민철에게 프로 생활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의 기쁨을 안겨준 특별한 해였다. 한국시리즈 당시 손톱 부상으로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지만, 1차전과 4차전 선발 등판을 훌륭히 소화하며 팀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또한, 시즌 중이던 9월에는 시드니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참가하여 일본과의 결승전에 선발 등판하는 등 대한민국의 올림픽 티켓 획득에 기여했으며, 한국시리즈 직후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도 선발 등판하여 3이닝 1실점을 기록하는 등 쉴 틈 없는 활약을 이어갔다.
특히 1999년 7월 23일 삼성 라이온즈전에서는 3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역대 5번째이자 최연소 세 자릿수 선발승 투수라는 의미 있는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 "엇갈린 기대와 냉혹한 현실"
시즌 | 출장경기 | 소화이닝 | 방어율 | 승리 | 패배 | 세이브 | 볼넷 | 삼진 | 출루허용률 | WAR |
2000 | 4 | 18.2 | 4.82 | 2 | 0 | 0 | 3 | 16 | 1.29 | 0.1 |
2001 | 8 | 40.2 | 4.65 | 1 | 2 | 0 | 15 | 28 | 1.45 | 0 |
정민철은 1998년부터 구단에 해외 진출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한화 구단도 조건부(우승)로 이를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1999년은 이적 시 이적료가 발생하는 마지막 해였기 때문에, 구단 입장에서도 지금이 '적기'였다. 우승 이후 나간다는 조건까지 맞아떨어지며 자연스럽게 해외 진출 수순이 열렸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오릭스 블루웨이브였다. 정민철, 구대성, 정민태를 대상으로 1999년 10월 공식 신분 조회를 요청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뒤늦게 참전하며 모든 판도를 바꿨다. 일본 최고 명문이자 자본력에서 압도적인 요미우리가 등판하자, 오릭스는 사실상 철수했고 정민철을 노리는 일본 구단은 요미우리로 좁혀졌다.
그런데 MLB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1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정민철의 신분을 조회하며 미국행 가능성이 급부상한다. 유력 후보는 시애틀 매리너스, 시카고 컵스, 콜로라도 로키스. 특히 컵스는 아예 트라이아웃과 항공권을 제안할 만큼 진지했으며, 정민철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정민철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선택했다. 계약 조건은 계약금 1억 엔, 연봉 5천만 엔, 이적료 2억 5천만 엔. 일본에서 에이스로 활약할 가능성과,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공을 도모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또한 한화 구단도 포스팅을 통한 MLB 진출보다 요미우리 측이 제시한 이적 조건에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었기에, 일본행은 구단과 선수 양측 모두에게 '윈윈'이었다.
화려한 기대와는 달리, 그는 스프링캠프 첫날부터 엄청난 훈련량에 압도당하며 스스로의 준비 부족을 절감했다. 구와타 마스미, 우에하라 고지, 구도 기미야스 등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즐비한 요미우리 선발진은 그에게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었다. 이미 팀에 자리 잡은 조성민과 발비노 갈베스 등 외국인 선수들과의 경쟁 또한 치열했으며, 외국인 선수 보유 제한이 없는 시스템은 잠시라도 부진하면 2군으로 강등되는 냉혹한 현실을 예고했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로 요미우리 유니폼이 잘 어울렸던 정민철이었지만, 그의 공은 더 이상 과거의 위력적인 '정민철의 공'이 아니었다. 패스트볼 구속은 눈에 띄게 저하되어 있었다. 데뷔전이었던 2000년 5월 야쿠르트 스왈로즈전에서 7이닝 4피안타 1실점으로 준수한 투구를 선보였고, 6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는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으나, 이전의 압도적인 구위로 얻어낸 결과는 아니었다. 이듬해 5월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무사사구 완투승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는 요미우리에서의 2년 동안 적잖은 시간을 2군에서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타국에서의 2군 생활은 그에게 뜻밖의 성장의 기회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 역시 비주류로 시작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 사람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프로 선수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벗어나 '사람 정민철'로서의 균형감을 갖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화 이글스 - "다시 독수리 품으로, 한 번 더 정민철"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2002년 한화 이글스로 돌아온 정민철은 당시 최고 연봉인 4억 원에 계약하며 구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시범 경기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이더니, 복귀 후 첫 경기에서 롯데를 상대로 1이닝 4실점 강판, 두 번째 경기에서는 2이닝 7실점하며 한 달간 2군으로 내려가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1군에 복귀했지만, 예전의 위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요미우리 시절 불안정한 입지로 인한 훈련 부족, 일본 진출 실패로 인한 의욕 상실, 그리고 초반 부진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 등을 부진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설상가상으로 팀 동료 송진우가 220이닝을 던지며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쳐 그의 복귀는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2003년, 연봉이 3억 원으로 삭감된 상황에서 정민철은 26경기에 등판하여 11승 10패, 평균자책점 4.00, 132탈삼진을 기록하며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리그 전체적으로 투수들의 성적이 저조했던 해였기에 4점대 평균자책점이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고, 시즌 후 그는 선수 생활 처음으로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으며 재기를 위한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2004년은 정민철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단 54이닝을 던지며 승리 없이 6패, 평균자책점 7.67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은퇴 시즌인 2009년을 제외하면 유일한 무승 시즌이자 가장 낮은 이닝 소화였다. 팔꿈치 수술 후 투구 매커니즘이 무너지며 다른 부위에 통증이 발생했고,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에게 다시 힘을 준 것은 김인식 감독이었다. 본인의 뇌경색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정민철에게 믿음을 보여주며 격려하는 노감독의 모습에 감동한 그는 2005시즌 재기를 굳게 다짐하며 훈련에 매진하게 된다.
절치부심한 2005년, 정민철은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빠른 공 대신 커브 위주의 제구력 투수로 스타일을 전환했고, 데뷔 때부터 달았던 55번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등번호 23번을 새롭게 새겼다. 이러한 변화는 전반기에 7승을 기록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6월 말 갑작스러운 팔꿈치 통증으로 주춤했고, 결국 9승 3패, 평균자책점 4.82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프로 14년 만에 찾아온 인대 손상은 그의 남은 선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의료진이 수술을 권유했지만, 33세의 나이에 수술이 부담스러웠던 그는 재활을 택했다.
2006년, 팔꿈치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일 변화는 여전히 효과를 보였다. 130.2이닝을 던지며 7승 13패, 평균자책점 3.93을 기록했다. 승운이 따르지 않는 경기가 많았지만,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5⅓이닝 1실점으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고, 한국시리즈에서도 기대 이상의 투구를 선보였다. 하지만 류현진의 데뷔와 문동환의 부활에 가려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2007년, FA 자격을 얻었지만 팀에 잔류하며 2년 총액 9억 원에 계약했다. 이 시즌, 그는 10년 만에 2점대(2.90)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완벽한 부활을 알렸다. 155.1이닝을 소화하며 12승 5패를 기록. 팀 마운드에 큰 보탬이 되었고, 일구상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다. 류현진과 함께 강력한 원투 펀치를 구축하며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고, 개인 통산 최연소 최소 경기 150승 달성, 통산 20번째 완봉승 등 의미 있는 기록들을 세웠다. 하지만 이는 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2008년, 37세의 나이에 체력 저하와 구위 감소를 극복하지 못하고 6승 10패, 평균자책점 5.23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팀 내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베테랑으로서의 책임감을 다했고, 통산 160승 고지를 밟았다.
2009년 9월 12일, 대전 홈구장은 '영원한 에이스' 정민철의 은퇴식을 위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감동적인 순간, 팀 후배들은 9점 차를 뒤집는 극적인 역전승을 선물하며 그의 마지막을 더욱 빛나게 했다. 과거의 영광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새 출발을 다짐하며 새롭게 새긴 등번호 '23'은 영구결번으로 지정, 한화 이글스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았다. "저는 능력 이상으로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그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선수 시절 끊임없는 노력과 변화를 통해 팀에 헌신했던 정민철의 모습은 팬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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