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페이" 이순철
SBS 스포츠 해설위원
생년월일 | 1961년 6월 1일 |
학력 | 광주서림국민학교 전남중학교 광주상업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프로입단 | 1985년 해태 타이거즈 1차 지명 |
소속팀 | 해태 타이거즈 (1985 ~ 1997) [14번] 삼성 라이온즈 (1998) [8번] |
통산기록 | 타율 .262 / 출루율 .345 / 장타율 .411 / OPS .756 / 홈런 145개 / 도루 371개 |
한국시리즈 우승 | 8회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 |
수상 기록 | 신인왕, 득점왕, 골든글러브 [1] (1985) 도루왕, 득점왕, 골든글러브 [2] (1988) 도루왕, 골든글러브 [3] (1991) 최다안타, 20홈런-20도루 클럽, 도루왕, 골든글러브 [4] (1992) 골든글러브 [5] (1993) |
주요 기록 | 역대 2번째 300도루 (1994) 역대 8번째 1,000안타 (1994) 역대 8번째 600타점 (1998) |
국가 대표 | 올림픽 : 1984 |
아마추어 - "두번째 선택, 인생을 바꿔놓은 야구"
이순철은 광주 서림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 다른 아이들보다 1년 늦게 야구를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축구를 하고 있었다. 축구부에서 가장 발이 빨라 학교에서 주목받던 이순철은 사실 축구를 꽤 잘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유니폼은 축구가 아닌 야구 유니폼이었다. 그의 축구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이유로 끝이 나게 되었는데 축구부가 해체되면서 이순철은 새로운 운동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때 야구부 코치의 제안이 그를 새로운 길로 이끈다. "야구 한번 해보자"는 말은 이순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축구 외에 가장 끌렸던 종목은 야구였다.
야구를 시작하면서, 이순철의 첫 포지션은 포수였다. 포수 출신 감독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포수로 시작했지만, 그의 빠른 발과 뛰어난 볼 처리 능력 덕분에 유격수로 포지션을 이동한다. 유격수로서 두각을 나타낸 이순철은, 프로 입단 전까지 이 포지션에서 꾸준히 성장하며 실력을 쌓았다.
전남중과 전남고를 거친 이순철은, 고교 1학년 때 봉황대기에서 대단한 경기를 펼친다. 당시 우승 후보로 꼽혔던 신일고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전남고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 전남고 야구부는 예상치 못하게 해체된다.이순철은 다른 학교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고향 팀인 광주상고(현. 동성고)로 전학을 결심한다. 그는 한동안 선배의 자리를 대신해 좌익수로 뛰기도 했으나, 곧 유격수로 복귀하여 다시 본래의 포지션에서 활약을 이어갔다.
연세대 진학 후, 이순철은 2학년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처음엔 유격수로 대표팀에 합류했지만, 외야로 자주 나가게 되면서 점차 유격수 감각이 희미해졌다. 결국 유격수 자리는 한양대의 류중일에게 물려주게 되고, 이순철은 외야수로 변화를 맞이한다.
해태 타이거즈 - "호랑이 군단의 야전사령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이순철은 1985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다. 데뷔 시즌 타율 .304, 12홈런, 31도루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신인왕에 올랐다. 이 기록은 2021년 이의리가 등장하기 전까지 36년 동안 유일한 신인왕 기록 이었으며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도, '바람의 아들' 이종범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었다.
시즌 | 타율 | 홈런 | 타점 | 도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1985 | .304 | 12 | 50 | 31 | .365 | .477 | .842 | 142.8 | 3.88 |
1988 | .313 | 13 | 52 | 58 | .404 | .483 | .887 | 155.8 | 5.02 |
1991 | .276 | 17 | 50 | 56 | .373 | .456 | .829 | 130.1 | 5.52 |
1992 | .309 | 21 | 76 | 44 | .389 | .494 | .883 | 139.8 | 4.67 |
1993 | .253 | 11 | 44 | 29 | .341 | .392 | .733 | 122.3 | 3.29 |
당시 이순철은 우리가 알고있는 외야수가 아니라 3루수로 입단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무주공산이었던 3루를 메워줄 유망주로 기대받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잘했다. 데뷔시즌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3루수의 자질도 보여줬다. 하지만, 1986년 한대화가 OB에서 해태로 트레이드되며 3루수 자리가 그에게 넘어갔고, 이순철은 외야수로 포지션 전환을 요구받는다. 그는 내야에서 더 경쟁하고 싶다며 외야 전환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이미 대학 시절 외야를 경험했고 1984년 LA 올림픽에서 외야수로 차출되기도 했던 만큼 빠르게 적응했다. 하지만 포지션 전환 초기에는 타구 판단에 어려움을 겪으며 실책도 자주 나왔다.
이순철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경기 전 다른 선수들이 타격훈련을 할 때면 중견수 위치로 나가 '소리만 듣고 타구의 방향과 거리를 판단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팬들 사이에서 "설렁설렁 수비하는데 편하게 잡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비력이 향상됐다. 이순철은 훗날 "밀어친 타구와 당겨친 타구의 소리는 약간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귀찮은 듯 공을 따라가 공을 쉽게 포구한 뒤,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야에 공을 던져주는 원조 라면수비의 시작이었다.
1986년, 그는 타율 .257, 14홈런, 19도루로 홈런 5위, 도루 7위에 오르며 외야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1987년에는 부진 속에서도 포지션 적응기였음을 증명하듯 1988년부터는 리그 최고의 1번 타자로 성장했다. 1988년 그는 타율 .313, 13홈런, 58도루로 한 시즌 최다 도루 신기록을 세우며 도루왕에 올랐고 홈런 8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1, 2차전 연속 결승타 포함 맹활약하며 팀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시리즈가 5차전 내에 끝났다면 문희수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MVP를 획득했을 활약이었다.
이듬해인 1989년, 타율은 .241로 떨어졌지만 12홈런, 24도루를 기록하며 무난한 시즌을 보냈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 이상 높았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타자 = 타율'이던 시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 이순철의 존재때문에 트레이드로 해태를 떠났던 김일권이 62도루로 도루왕에 오르며 이순철의 도루 기록을 갱신했고, 1990년에도 김일권은 48도루로 도루왕 2연패를 달성했다.
1990년 이순철은 타율 .249, 12홈런, 26도루로 전년도와 비슷한 성적을 기록하며 안정세를 이어갔고, 1991년에는 타율 .276, 17홈런, 56도루로 좋은 성적을 올리며 골든글러브를 획득했다. 김광수와의 경쟁을 뚫고 도루 1위에 올랐고 홈런 7위에도 오르면서 팀의 여섯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그 다음 해, 1992년은 이순철 커리어의 절정기였다. 타율 .309, 44도루, 152안타, 21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도루왕과 최다안타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20-20 클럽'에도 가입했다. 최다안타와 도루왕을 동시에 달성하며 20-20을 이룬 선수는 이순철이 유일하다. 비록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게 밀려 해태는 탈락했지만, 그는 플레이오프에서 타율 .391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1993년, 시즌 초반까지 이순철의 OPS는 이종범보다 1할 가까이 높았고 6월 17일까지 1번타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은 6월 18일부터 이종범을 1번에 고정 기용하며 이순철을 3번 자리로 이동시켰고, 중심타자 자리가 부담이 되었는지 성적은 다소 하락했다. 그러자 언론은 이순철의 성적이 매우 떨어져 이종범에게 1번 타자를 내준 것처럼 보도했다. 하지만, wRC+ 기준으로 보면 이종범과의 차이는 단 3포인트였다. 언론의 과장된 보도와는 다르게 세대교체라는 명분 속에 이순철은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1994년에는 부상과 에이징 커브로 85경기 출전에 그쳤지만 타율 .322로 반등하며 8홈런, 18도루를 기록했다. 만약 이순철이 이 시즌에서 은퇴했다면 5툴 플레이어의 교과서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시즌에서 엄청나게 기록이 하락했고, 이듬해에는 선수 생명의 지장을 줄 수있는 사건과 연루되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95년, 96경기 출전, 타율 .201, 7홈런, 13도루, 병살 20개, 출루율 .278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했다. 94년 은퇴했다면 남지 않았을 너무나도 처참한 커리어 로우 기록이었다.
1996년은 하와이 전지훈련 중 코칭스태프와의 갈등으로 시작됐다. 이른바 '하와이 항명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의 여파로 팀 분위기는 요동쳤다.
[** 당시 해태는 코치진이 선수들에게 폭언과 폭행은 물론, 빨래까지 시키는 등 시대착오적인 관행이 남아 있었다. 선수단 내부에는 이런 문화에 대한 불만이 점차 쌓여가고 있었다. 2월, 해태는 하와이 호놀룰루로 전지훈련을 떠났고, 혹독한 훈련에 지친 일부 선수들이 규정을 어기고 숙소를 벗어나 유흥주점을 찾았다가 코칭 스태프에게 적발된다. 이를 계기로 코치진은 선수단 전반에 대한 점검에 나섰고, 분위기는 더욱 악화됐다. 결정적인 사건은 아침 훈련 중 발생했다. 코치진의 요청에 짜증섞인 반응을 했던 최고참 이순철에게 유남호 코치가 손찌검 하는 장면을 김정수가 보게 된 것. 이에 화가 난 김정수는 선수단을 이끌고 훈련을 보이콧하면서 해태의 코치진과 선수단 사이의 갈등이 세간에 조명되게 되었고, 이 사태는 '하와이 항명 사건'으로 기록됐다. **]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이순철은 팀의 최고참이자 야전사령관으로서 분열된 팀을 하나로 묶는 데 앞장섰고, 결국 해태는 6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를 호령하는 강자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다만, 개인 성적은 아쉬움이 컸다. 이순철은 타율 .219에 머무르며 반등에는 실패했다.
1997년, 이순철은 타율 .213으로 더욱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 해 입단한 신인 외야수 김창희와의 주전 경쟁에서도 밀리며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이 결정은 단순한 성적 부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즌 전 하와이 전지훈련 중 발생했던 항명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이순철에게 내려진 '보복성 조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선수 생활 내내 함께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가을 야구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결국 그는 시즌 종료 후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작별을 결심하게 된다.
해태는 트레이드를 요청한 이순철을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하며 결별했다. 화려했던 커리어의 마지막은 씁쓸한 작별로 막을 내렸다.
삼성 라이온즈 - "빛나던 별, 조용히 지다"
해태에서 방출된 뒤 은퇴 위기에 몰린 이순철에게 손을 내민 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마침 해태 시절 선배였던 서정환 감독이 팀을 이끌고 있었고, 이순철은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시즌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고, 프로야구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갈아치운 것을 제외하면 72경기 출전, 타율 0.213, 2홈런 3도루에 그치며 이름값에 걸맞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시즌이 끝난 뒤엔 은퇴식도 없이 조용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렇게 위대한 전성기를 지나온 그는, 스포트라이트도, 작별의 박수도 없이 조용히 유니폼을 벗었다. 화려했던 커리어의 끝은 그렇게 조용하고 담담했다.
'Welcome to Baseball'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설자가 된 레전드들 - ⑤] 그라운드를 겨누다, 스나이퍼 장성호 (0) | 2025.05.29 |
---|---|
[해설자가 된 레전드들 - ④] 완벽을 향해 던지다, 독수리 에이스 정민철 (1) | 2025.05.09 |
[해설자가 된 레전드들 - ➁] 꿈을 향해 질주하다, 야생마 이상훈 (0) | 2025.04.30 |
프로야구는 어떻게 대한민국 국민 스포츠가 되었을까? (1) | 2025.04.26 |
[해설자가 된 레전드들 - ①] 호타준족의 대명사, 리틀 쿠바 박재홍 (1) | 2025.04.25 |